북유럽 여행기
06.06.28- 06.07.09 (11박 12일)
1일째 ( 6월 28일)
'06. 6월28일 su600 항공 13:30 출발 (항공지연으로 16:30분발)모스크바도착 -->코페하겐출발
현지 시각 22:00시 (다시 2시간을 줄여서)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
공항의 바닥은 질 좋은 원목을 바닥재로 썼다. 어디를 가나 바닥은 모두 원목이었다.
숙소는 공항에서도 버스로 달려 4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 캄캄한 도로를 한참 달려 숙소까지
창밖을 보며 새로운 세계를 느끼고도 싶었지만 조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예약된 호텔에 도착해방 배정을 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침실에 들어왔을 때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여행 첫날은
이렇게 24시간이 아니라 31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하루를 끝낼 수 있었다.
2일째 (6월 29일)
본격적인 유럽 여행이 시작되는 날이다. 피곤했음에도 잠은 들지 못했고 이미 새벽 3시 너머 창밖에선
날은 밝아 오고 있었다. 창너머 산위주위 사방이 해가 뜨느라고 전부 붉은색이었다 그 감흥은 무얼로 표현
해야 옳을까? 그리고 깜박 잠들어 아침5시에 일찍 잠에서 깼다.

위도가 높은 곳에 있는 나라라 여름에 백야를 실히 즐감하였다. 현지 시각 6시경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차에 오름 . 숙소에서 나와 시내까지 오는데 주변의 모습이 새삼스럽다. 처음 보는 유럽의 모습이 아니던가? 도로 양옆으로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있어서 자전거를 탄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교통 혼잡을 막고 자동차 배기가스 양을 줄이고자 하는 당국의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중앙분리대가 널찍하게 조성되어 있고, 도로 바로 위에는 조명등으로 보이는 것이 일정한 간격으로 가느다란 전기 줄에 매달려 있는데, 하늘을 가리고 있어 조금은 답답하다. (그 이후 둘러 본 북유럽의여러 나라들도 공통적으로 그런 도로 조명을 쓰고 있음을 확인함) 차라리 우리나라의 가로등이 더 잘되어 있다.
개인 주택으로 보이는 단층집들이 무성한 숲에 둘러싸여 있는데, 붉은 색 계통의 페인트칠을 한 지붕이 이채롭다. 지붕에 나 있는 창들이 운치 있는 다락방들.
현지 가이드가 차에 타면서 코펜하겐 시내 투어는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시청사였다. 안데르센 거리를 가운데 두고 티볼리(TIVOLI) 놀이 공원 입구와 마주한 곳이었다. 1905년에 건립된 붉은 색건물인데, 아주 견고해 보였다. 그 안에서는 7명의 시장이 주민투표에 의해 선출된 55명의 시의원들과함께 시정을 펼쳐나간다고 한다.
그 앞 광장은 상업의 중심지답게 사방 어디를 봐도 탁 트여 있어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락거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광장 한 켠엔 덴마크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동화작가 안데르센(1805-1875)의 동상이 길 가운데 조각
되어 있었다.

안데르센 동상 앞에서 시청사
루팡의 모자를 쓰고 왼쪽 손은 지팡이를 거머쥐고 오른 손은 책을 읽고 있었던지 손가락 하나가 덮여진 책 사이에 끼어있으며 티볼리 공원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동상을 매만지면서 사진을 찍었던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의 두 무릎에는 푸른 녹이낄 사이도 없이 누런 구리 빛을 띠고 있어서 그 위에 앉아 보면 매우 따스할 것만 같다. 맨 먼저 장미의 성으로 불린다는 어느 왕의 성으로 갔다. 60년간 재위했던 크리스천 4세가 여름에만 사용했다는 성이란다. 그리 크지도 않은 400년 전의 성인데, 주변의 풍경이 참 좋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배경삼아 사진을 찍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성 앞에 위치한 공원은 날씨만 좋으면 많은 남녀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곳이라고 한다.

키에르케고르 동상앞에서
설명은 계속된다. 덴마크의 국민소득은 3만 8천불이고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55세 이상만되면 연금 대상자가 되고 최저생활비 정도는 국가에서 대준다고 한다. 의료비도 모두 무료다. 대신경제활동을 할 경우 세금이 많아서 적게는 38%에서 많게는 62%까지 세금을 내야 하는데, 국민 모두가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바닷가의 인어공주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인어공주 동상 앞에서
그의 주옥같은 동화 작품을 기념하기 위해 누군가를 모델로해서 오래 전에 세워진 것인데 그간 신체의 일부가 자주 파괴되는 수난을 거쳤고 현재의 모습은 최근에복원해 놓은 것이긴 하나 인어공주 상 앞에서 사진을 찍지 않으면 덴마크를 왔다 갔다 할 수없다고 하니 너도나도 사진 담기에 바빴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기 삶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자신의 영혼의 자화상을 동화 속에 그려놓은 것은 물론, "어른들을위한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만이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안데르센과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안데르센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작가가 아닐까?
처칠 공원에 있는 게피온 분수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오각형 모양의 덴마크 요새가 가까이 내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성공회 교회가 서 있는데 분수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분수대에 있는 신화의 주인공과 황소의 조각은 실물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왕궁인 아마리엔보 궁전으로 갔다. 덴마크는 전통적인 왕국으로서 입헌군주제를도입한 나라인데 현재의 왕은 여왕으로서 불란서 사람과 결혼했고, 5개 국어에 능통한 67세의엘리트로 잘 생긴 두 아들(각각 37, 36세)을 두었다. 왕족들이 휴가를 갔는지 건물 위엔 국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관식을 올렸던 마모아 교회를 중심으로 제일 왼쪽이 현 왕이 거처하는 곳인데, 근위병들이 곰털 모자를 쓰고 어슬렁거리며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그 바로 옆에 영빈관이 있고 교회 건너 비슷한 규모의 큰 아들 궁, 그 옆 작은 아들 궁이 위치했는데 전체적으로 건물들이 큰 원을 그리고 있다. 특별한 권위가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서운 왕궁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한 궁전 같다.
아마리엔보 궁전
낮은 자세로 국민과 함께 하겠다는 통치자의 의도가 담긴 바로크풍의 건물이었던 것이다. 마모아 교회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뒤로 돌아서면 바다 건너 오페라 하우스의 위용이 한눈에 보인다. 멀리서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보면 14층 규모의 공연장이라고 하니 그 규모가 놀랍다. 바다를 끼고 있는 만(灣)이라서 그런지 운치가 넘친다. 한참을 머물렀으면 좋으련만 가이드의 독촉을 뿌리칠 수 없다. 코펜하겐의 현지 가이드와도 작별하고노르웨이의 오슬로를 향해 발길을 옮겨야 했다.
노르웨이로 가기
코펜하겐에서 40분 정도 달려가면 스웨덴과 제일 가까운 국경 지방에 이른다.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동서 방향의 긴 다리로도 연결되었다고 하는데, 우린 SCANDLINE 배를 타고 국경을 넘기로 했다. 엄청난 규모의 배인데 수십 대의 소·대형 차를 실은 채 20분 정도 배를 타고 가면 되는 것이다.
유럽 연합(EU) 국가들끼리는 이렇게 국경의 넘나듦이 쉽다. 비자가 따로 필요 없으니 그저 통과다.
상징적인 국경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 땅을 경유하여 노르웨이로 향하는 길은 참으로 멀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고속도로를 타고 하루 종일 가야 하는 것이다. 몇 시간을 달렸는지 기억나지 않으나 비슷한 풍광을 계속 내다보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국경 구분은 차선도로의 색깔이다 덴마크는 흰색 차선
도로이고 노르웨이는 노란선 차선도로이다.
대낮인데도 모든 자동차들이 전조등을 환하게 켰다. 백야가 있는 나라여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특히 겨울은 낮이 매우 짧고 밤이 길어서 늘 전조등을 켜야 하니까 아예 시동이 걸리면 저절로
켜지도록 설계된 차들이라고한다. 광활하게 펼쳐진 누런 보리밭, 그리고 고추 냉이밭 그리고 평원의
곳곳에 평화롭게 자리잡은 농가들, 한 폭의 그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저렇게 넓은 들을 다 차지하고
마음껏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풍요로움과 너그러움이 부럽다. 가도 가도 높은 산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예테보리란 도시가 우리를 맞이한다. 도시 속으로 한참을 들어가 쿠스타프 동상이 보이는
시 청사 앞에서 잠깐 내려 구경하고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향하는 여행은 계속된다. 식곤증 때문에 차창에 기대어 잠을 좀 자기도 했지만
그냥 자면서 지나치기엔 너무도 아까운 풍광이라 애써 잠을 깨운다. 언제 이곳을 다시 오겠나 싶어서
하나라도 더 볼 심사다. 평원지대를 좀 지나니 본격적으로 자작나무, 소나무, 전나무 등이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침엽수림의 연속이다. 햇빛을 받아 자작나무의 곧은 줄기가 더욱 하얗게 보인다.
곧게만 뻗느라 차라리 밑에는 솔잎 하나 남겨두지 않은 소나무와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는 듯
하다. 홀로 떨어져 민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곧기는커녕 속 편하게 수많은 가지를 옆으로 퍼뜨리고
있지 않던가? 쑥도 삼 속에서 자라면 도와주지 않아도 곧다(蓬生麻中 不扶而直)는 말처럼 자라는
환경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가이드가 틀어주는 노르웨이 작곡가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는 더욱 애절하게 노르웨이의 국경
진입을 재촉한다. E6 고속도로(국도)라고는 해도 편도 1차선, 평소는 통행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단다.
한참을 달렸다. 그래도 아직 국경은 멀었나 보다. 집단을 이룬 캠핑카들이 그들의 부를 상징하듯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다들 휴가를 즐기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 드디어 국경이다. 국경이라고 해도 특별한
표시가 없다. 그저 검표하는 장소가 차도와 차도 사이에 있을 뿐 잠시 섰다가 곧바로 통과다. 그런데
수도 오슬로까지는 두 시간 정도를 더 가야 한단다. 국경을 지나면서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침엽수림
이 더 자주 나타나고 마을의 분위기도 더욱 목가적으로 변했다.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눈앞의
현실로 무궁무진 나타나는 것이다. 밤 9시가 지났는데도 그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북유럽의 여름철에 흔히 경험한다는 백야를 우리도 즐기게 된 것이다. 호텔은 오슬로에서 30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늦은 식사를 하고 여장을 풀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었다. 잠이 안와 새벽 3시쯤 먼
산주변에는 붉게 태양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잠이 잠깐 들었나보다.
3일째 (6월 30일)
다음 날 새벽 5시 30분에 잠이 깨었다. 대도시 근교의 매력이 한껏 느껴지는 곳이라서 하룻밤 머물고
떠나기엔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슬로 관광을 위해 여장을 꾸렸다. 오슬로 시청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는
하나님의 땅이란 뜻의 오슬로 시내 관광을 오전 중에 하고, 우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오슬로 시청사로 갔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 450만의 9/1인 50만 인구가 제1의 도시 오슬로에 살고 있으며, 시청사는 1931년
시장의 모금 운동을 시작으로 20년에 걸쳐 건축되었고 해마다 12월 10일이 되면 오슬로 시청사 중앙
홀에서 노벨평화상을 시상하고, 몇 년 전 우리나라의 김대중 전대통령도 여기서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오슬로의 중심지요, 노르웨이의 심장부라고 하는 칼 요한 거리에는 왕궁을 비롯하여 국립오슬로
대학교(1811년 건립), 국립극장, 역사박물관, 국립미술관 등이 산재해 있다. 1988년에 설립한 국회
의사당이 위용을 자랑하고 영국식 정치를 지향하고 있는데 다수당인 노동당이 현재 집권을 하고
있다. 오슬로는 북위 59도에 위치하며 크고 작은 5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구의 74%가 상업에
종사하나 상점은 늦게 문을 열고 오후 5시만 되면 닫는다고 한다.
쿠스타프 비겔란(1869-1943)의 조각 공원으로 갔다. 남북 865미터의 길이, 10만평 규모의 조각
공원인데 한 조각가의 일생과 예술적 신념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공원 입구의 오른 켠에는
조각가 자신의 동상이 서 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실제 크기의 조각상.

비겔란의 조각 공원
거대한 개인 조각공원을 가진 조각가는 아마도 어느 나라 왕보다도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13세에 오슬로로 유학을 온 비겔란은 19세부터 조각가로서의 웅대한 꿈을 갖고 2번의 개인전과 모금
운동을 통한 전시회를 한번했다고 한다. 그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를 자랑스럽게 여긴 오슬로
시는 1921년 비겔란과 계약하여 그의 모든 요구를 다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가 설계한 대로 조각
공원을 만들고 거기에 청동과 화강암만을 재료로 한 193점의 조각품과 260점의 인물들을 새겨 놓게
된다. 죽고 나면 살았던 집을 박물관으로 쓰게 하고 입장료를 받아서는 안 되고 모방작을 없게 하라는
작가의 유서에 따라 오슬로 시는 지금까지 해마다 조각 공원을 유지하는데 연간 7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지출해야 한다고 한다. 입장료를 받게 되면 엄청난 수입을 올려 시의 예산 확보에도 큰
도움이 될 테지만 고인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시 당국의 태도가 존경스럽다.
그가 남긴 조각품을 감상하노라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다리 위에 새겨진 58개의
청동 조각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어린 아이가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갑자기 양손에 힘을 주고 냅다 울어대는 서너 살배기의 발가벗은 모습.
광장 분수대에 새겨진 조각품이 또한 보통이 아니다. 거대한 솥 모양의 분수대를 받쳐 들고 있는
6명의 장정들을 조각한 것이다. 비겔란의 제자들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그 힘의 강약은 인생의 무게로
느껴졌고, 그 분수대 주변에 배치된 청동 조각은 인생의 생노병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다시 계단을 올라 화강암을 재료로 조각한 군상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원형무대를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작품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해 놓은 것 같은데, 인체의 핏줄, 근육, 갈비뼈, 표정까지
그대로 살려서 마치 살아 숨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듯하다. 특히 한가운데 우뚝 솟은 17미터
높이의 모놀류트는 압권이었다. 오슬로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240톤의 화강암을
6개월에 걸쳐 운반해다가 180톤의 완성된 작품이 되기까지 제자들과 함께 14년 동안 매일 작업을
했고, 비겔란 자신이 죽는 날까지 망치와 정을 놓지 않았다. 121명의 인물들이 뒤엉켜 있는
조각품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비겔란의 치열한 작가 정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비겔란의 작품은 널찍한 공간과 잘 정돈된 인상인데 무엇보다 그 조각의 모티브가
사람임을 보여 주고 있다. 아이들 늙은이들 젊은이들을 각기 독자적으로 조각했는가 하면, 한
람의 일생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을 겹쳐 기둥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인생이란 그만큼 서로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쉽게 이해하기로 하였다.
다음은 바이킹 박물관을 둘러보는 순서다. 십자형 건물의 전시관 안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바이킹이라 함은 8세기~10세기경, 유럽의 여러 해안을 휩쓸던, 모험적·호전적인 북방 노르만
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당시 그들이 사용했던 배와 유물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역사는 바이킹의 역사라고 한다. 고도로 발달한 선박 기술을 바탕으로 지중해, 흑해,
대서양, 북미 일대까지 누비면서 그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나름의 역사를 만들었다.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과 용감성으로 온 유럽을 호령했을 테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바이킹 선이
1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스란히 남아있어 놀랍다.
오슬로의 피오르드에서 발견된 오세베르그호, 고크스타호, 투네호 세 척은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1867년, 1880년, 1904년 각각 발굴되었다고 한다. 노를 두는 위치에 따라
전투용과 유람용이 구분되는 것 같았는데 오사 여왕이 탔다는 오세베르그호는 고물과 이물의
또아리를 튼 부분과 곡선 부분에 부조로 정교하게 조각된 것이 특별해 보이고, 15명씩 양쪽에서
노를 젓게 되어 있다. 다른 두 척의 배에 비해 규모도 좀 작다. 9세기에 만들어진 고크스타호는
길이 23미터, 최대 폭 5미터 32명이 노를 젓고 돛을 달아서 항해하는 전형적인 바이킹 선이다.
투네호는 배 밑바닥을 제외한 다른 부분이 대부분 부패된 채 발견되었는데 원거리 항해용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발굴 당시 배 안에는 남자 무덤이 들어 있는 목관과 부장품들이 있었는데
이는 매장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시내 관광은 조각공원과 바이킹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끝을 냈다.

바이킹 박물관 바이킹족이 신은 신 (발사이즈가 작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한식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서해안에 위치한 노르웨이 제2의 도시이자 피요르드의 도시 베르겐까지
가는 본격적인 피요르드 관광에 나설 차례다. 그러나 앞으로 3박 4일간 지겹도록 버스를 타야 하니
다들 걱정이다.
노르웨이에는 300여명의 한국 교민들이 산다고 가이드는 덧붙인다. 오슬로에서 E6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면 노르웨이에서 제일 크다는 ‘며싸’ 호수를 만난다.
아주 길쭉하게 생겼는데 그 둘레가 자그마치 100킬로미터이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호수 주변에는
농가들이 띄엄띄엄 자리하였는데 어디를 보아도 좋다. 한 폭의목가적 그림도 그보다 아름답지 않으리라.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도 결국 넓디넓은 목초지와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더미와 자작나무, 소나무,
전나무 등이 연출하는 침엽수림의 조화에서 오는 것이리라. 바람도 거의 없는 나라여서 얕은 뿌리로도
쓰러지지 않고 잘 자라고 있다. 암반 지대에 표토가 얇게 붙어있는 정도가 대부분인데도 나무들도 삐쭉
삐쭉 키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나름대로의 생존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나라처럼 바람이 많았다면 다
쓰러지고 없을 나무들이다. 나무의 지름은 얼마 안돼도 키는 비정상적으로 큰 것 같다.
또 한참을 달리니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던 릴레함메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환경올림픽이라
일컬어질 만큼 환경 오염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에서 기획되었던 올림픽 장소였다. 인구 2만의 작은 도시가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올림픽을 훌륭히 소화해 냈던 것이다. 시설을 특별히 만들지 않고
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했고, 가장 큰 문제인 선수단의 숙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이 살던
집을 선수들에게 전적으로 제공하고 휴가를 떠날 정도로 유기적인 협조가 적극적으로 잘 이루어졌다.
또 감자 가루를 이용하여 포크, 나이프 등을 만들어 사용, 폐기하는 등 환경을 살리는 모범 사례를 보여주었다.
130미터, 145미터의 긴 슬로프를 가진 점핑대의 위용을 보면서 그 지역에서 많이 나오는 자연석을
쌓아서 만든 축대와 그 주변에서 조망해 보는 경치와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솟아오른 뭉게 구름도
기막히게 멋있다.
도시 밑으로는 호수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내려다보이는 전원 주택의 모양새는 제각기 개성을
자랑하고, 짙고 옅은 지붕의 빛깔이 또한 강렬하다. 올림픽을 치른 이후 릴레함메르는 전과 다르게
상권이 제법 형성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도시가 되었다. 겨울에는 이 도시가 영하 18도까지
내려가기도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100% 전기 난방으로 잘 지어진 가옥에 이중창을 쓰기 때문에
그렇게 아늑할 수 없고 비탈진 길도 전기 열선을 묻어서 많은 눈이 오더라도 금방 녹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여느 나라 같으면 전봇대의 전기줄이 으레 보일 법한데, 하나도 없다. 모두 지하로 전깃줄을 묻었다.
시스템이 잘된 나라인가 보다.
연속되는 좋은 풍경도 이젠 질릴 지경이다. 가도가도 계속되는 목가적 풍경에 다들 기가 죽었는지
처음에 들리던 탄성도 이제는 멎었다.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이 많다. 릴레함메르에서 약 두 시간을
북북서쪽으로 달려가니 오따란 곳에 도달한다. 거기서 다시 산정 호수와 호텔이 있는 곳으로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한다. 가이드는 환상적인 곳에 묵을 수 있어서 다들 좋아할 거라며 피로에 지친 우리를
위로해 준다. 침엽수림을 뚫고 올라가는 기분도 자못 좋다. 매우 낭만적이다.
호텔은 1900년에 건립된 목조 건물이었는데 박공에 용머리 모양을 해서 옛 멋을 살려 좋고, 내부
시설 또한 상당히 좋다. 창을 열고 산정 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더 좋다.
다른 건물이라고는 없다. 호텔과 그 부대 시설만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하여 분위기 잡기에 적당한
곳이다. 야외 수영장도 자작나무 그늘 아래로 만들어져 있고 테니스 코트도 옆에 있다. 테라스
밑으로는 잔디밭이 일품이고 그 아래로는 이름모를 꽃들이 몇 종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떤
일행들은 호텔 난간에 기대어 호수를 배경을 사진 찍기에 바쁘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산이 가마득하다.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끝내니 오후 9시인데, 해가 넘어가려면 아직 멀었다.
밤 11시를 훨씬 넘어 자정이 다 되어가도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는 백야의 한가운데서 잠조차
잊은 채 밤이 더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